자유기고/시를 품은 수필

[그릇에 담긴 물]

한송이 안개꽃 2023. 1. 12. 13:43

시 


[그릇에 담긴 물]

 

 

물은 안도했다

그릇 안에 기대었다

 

물은 도착했다

물 그 자체로 머물 곳에

 

얼음 되어

송곳으로 찌를 살벌함 없이

오물 되어

더럽히려는 심보 없이

 

물이 그릇에 담기었다

 

그릇 안에 감돌며

그릇을 빚졌던 손길에 뺨을 비비고

그릇을 끌어안았던 가슴에 가득 안기고

그릇을 굳게 했던 불길을 기억했다

 

그릇에 담긴 물은

그렇게 그릇에 담기어

물이 되었다

 

 

- 박 상 민 - 

 

부엌에서 물 한 잔 마시며...

 

 

수필


[그릇에 담긴 물] 

 

 

자존심, 자만심 그리고 자신감, 자존감...

 

이 네 단어는 서로 교차하며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각각 제 갈 길로 갈라져 극명하게 차이를 드러낸다. 

 

우선 공통점은 한자어 자(自)이다. 자존심(心)이든 자만심(慢心)이든 혹은 자신감(感 )이든 자존감(感)이든 모두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네 가지 모두 어쨌거나 출발점은 나 자신이다. 나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이 네 가지의 감정과 태도를 '그릇에 담긴 물'을 의인화한 이야기로 풀어보고자 한다.

 

어느 날 물이 그릇에 담겨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릇에 이름 모를 충격이 가해졌고 그릇은 끔이 가고 깨어졌다. 물은 출렁이며 화들짝 놀랐다. 갈라지고 부서진 곳으로 느닷없이 도망쳐야 했고 여기저기 사방으로 길을 잃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렇게 넘어져버린 물에게 호된 추위가 불어닥쳤다. 철퍼덕 엎어져있던 물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뾰족하게 날이 선 형태가 기이했지만, 금세 자신의 모습에 익숙해졌다. 쫓기듯 도망치면서 마주했던 파편의 날카로운 얼굴 조각과 닮아있었으니까. 

 

물은 얼음이 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굳혀갔다. 이전처럼 그릇 안에서 유연하게 춤추며 놀진 못했지만, 개성 있게 변해버린 자기 모습에 점점 매료되었다. 충격과 추위를 거울처럼 보여주는 자신의 외형은 어딘가 독창적인 데가 있었다. 그때 그 충격으로 가장 무서워하며 가장 멀리 도망쳤던 녀석은 한기에 정면으로 맞서려는 듯 송곳처럼 변해있었다. 그 뾰족함은 추위에 정면으로 맞서 찌를 곳을 찾았고 자신을 그릇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던 놈들에게 복수하려는 듯 결연해 보였다. 얼어서 굳어버린 형체가 온몸으로 불편했지만 기이한 독창성을 묘하게 긍정했다. '난 말이야...', '내가 말이야...'라며...

 

얼어붙은 몸뚱이는 강했지만, 더 센 것과 부딪히면 무참히 부서졌다. 조각난 곳은 금세 또 다른 송곳이 되어 다시 찌를 곳을 찾았고 맹렬히 몸뚱이를 방어했다. 가끔 따뜻함에 얼음이 녹을 때면 몸은 삐거덕거렸다. 겁이 나서 불편을 감수해가며 또다시 도망을 쳤다. 온몸 곳곳으로 깊숙이 뻗쳐있는 날카로움과 사방팔방 치솟은 살벌함은 푸르고 차가운 분노로 돌변하여, 마침내 얼음을 녹였다. 마치 불길이 타오르듯 뻗어나가는 힘을 타고 물은 흘러넘쳤다. 물인 듯 불인 듯한 것이 지켜야 하는 선을 무시하고 여기저기를 침범했다. 힘닿는 데까지 드러누웠으며 힘이 뻗는 과정에서 더러움이 묻었고 그 더러움과 뒤엉켜 더러움을 퍼뜨렸다.

 

결국 힘이 다하고 땅속에 스며드는 것 말고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때, 물을 찾아온 두 손이 있었다. 두 손에 의해 흙투성이가 된 덩어리가 들어 올려졌다. 넘어져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들어 올리듯. 두 손은 조심스럽게 그리고 힘차게 구석구석 다가왔다. 뒤섞여 있는 곳으로... 날카로웠던 곳으로... 더러웠던 곳으로... 내팽개쳐져 있던 곳으로... 이곳저곳 마다하지 않고 모든 손길과 함께 빚어졌고 점점 매끈해졌다. 두 손길이 뻗어 나온 가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을 때, 그곳에는 어떤 말 없는 따뜻함이 홀로 숨 쉬고 있었다. 그 호흡만으로도 씻기지 않고도 깨끗해지는 걸 느꼈다. 흙투성이가 되었던 물은 그렇게 가슴에 안기어 두 손으로 비벼지면서, 맨 처음 그릇 안에 있었던 태곳적 고요한 순간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매끈하게 다져진 연약함은, 환하고 검붉은 불씨 속에서 다져지고... 다져지고...

 

연약함 그대로 매끈해진 그릇 안으로, 이제 물이 조금씩 채워진다. 매일매일 한두 방울... 때로는 시냇물처럼 졸졸졸......  조금씩 채워지며 물은 '이제 오롯이 물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다'라고 자신을 한 방울씩 믿는다. 가득 넘치지 않는 어떤 적절한 선에 입을 맞추고 물과 그릇은 자족함을 나누어 갖는다.

 

물은 안도했다. 그렇게 그릇 안에 기대었다. 물이 물 그 자체로 머물 곳에 도착했다. 얼음이 되어 송곳으로 찌를 살벌함 없이, 오물이 되어 더럽히려는 심보 없이 물이 그릇에 담기었다. 그릇 안에 감돌며 그릇을 빚졌던 손길에 뺨을 비비고 그릇을 끌어안았던 가슴을 가득 안아주었다. 그릇을 굳게 했던 불길에 말없이 따뜻했다.

 

그릇에 담긴 물은

그렇게 그릇에 담기어

물이 되었다

 

 

- 박 상 민 -

전통 찻집에서 차 한 잔 마시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