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번역/번역가 칼럼

[번역 여행] 반가사유상 관람 후기_"철기 시대의 폭력과 구원의 미소"

한송이 안개꽃 2023. 1. 23. 17:46

 


국립중앙박물관을 아이들이랑 방문했을 때, 이리저리 아이 보느라 관람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반가사유상을 보러 갤러리로 들어갔는데 둘째 아이가 어두운 방에 조각상이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이 무서웠는지 얼른 나가자고 했다. 제대로 관람하지 못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에 아쉬움이 남았다. 묻어둔 아쉬움이 때가 되면 어떤 동기와 작동하여 또다시 발걸음을 내딛게 한다. 이번에는 나 홀로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가는 길

 

여러 유물을 관람하겠지만, 맘속에는 반가사유상을 다시 감상하겠노라는 다짐이 있었다. 방문하기 전날 오랜만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사유의 방'(A Room for Quiet Comtemplation)이라는 이름으로 별도의 갤러리를 구성하여 반가사유상 두 점을 전시하고 있었다. 반가사유상 하나만으로도 신비롭고 아름다운 느낌을 자아내지만, 공간적 구성과 조명을 새롭게 하여 심오한 매력을 한 층 더 발산하고 있었다. 작품에 대한 약간의 공부와 직관적인 느낌을 연결하여 감상 후기를 남겨본다.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의 대표 무기에는 각각 돌도끼(뗀석기, 간석기), 청동검, 그리고 칼(창)이 있다. 무기의 역사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얼마나 손쉽게 죽일 수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구석기와 신석기시대에는 살상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생존 경쟁 과정에서 누군가를 공격하더라도 돌멩이를 던지는 수준일 가능성이 높다. 청동기 시대에는 구리와 주석 그리고 아연을 섞어서 만든 청동검이 만들어졌는데, 그 살상력이 도드라져 보이지는 않는다. 중앙박물관에 전시된 비파형 청동검도 지배층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용도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에 노예제도가 있었다는 기록을 보면, 아마도 청동기 시대가 원시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라 할 수 있다.

청동기 시대 무기들

 

그러나 철기시대로 들어서면 전쟁 양상은 사뭇 달라진다. 쇠붙이라는 건 무게는 줄고 날카로움과 견고함은 청동 무기보다 한 층 더해진 것이어서 한 번에 누군가를 살해할 수 있는 무기임이 틀림없다. 박물관에 전시된 철기 시대 무기를 훑어보았을 때, 녹슨 채 굳어 있긴 하지만 살상 무기로서 섬뜩함이 뚜렷해 보였다. 사람을 한 번에 찔러 죽이거나 벨 수 있는 창과 칼의 등장은 지배와 피지배 구조를 더욱 견고하게 하여 중앙집권적인 사회 형태를 띠는 데 이바지했다. 철기 시대의 국가였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지배사회를 공고히 했으며 대규모 정복 전쟁을 펼쳤다. 철기시대 무기로 수천수만 명이 전쟁으로 죽어 나갔다.

철기시대 무기들

 

을 휘둘러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상대를 찌르거나 베기 위해 칼을 손에 쥔 사람도 엄청난 살상의 힘을 발휘해야 함을 뜻한다. 죽어 나가는 상대의 피와 죽어가는 상대의 눈빛을 마주해야 하는 것도 포함한다. 칼 이후의 무기인 총(gun)은 끔찍함이 더하다. 손가락 하나로 상대를 죽일 수 있으니 말이다. 상대의 피가 내 몸에 튀지도 않고, 죽어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볼 필요도 없이 손쉽게 살상할 수 있는 무기가 바로 '총'이다. 신병교육대에서 처음 K-1 소총을 쏘았을 때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격장에 자욱하게 퍼져있는 모래 먼지와 코 밑으로 매캐한 화약 냄새... 그리고 총을 쏘는 것과 동시에 개머리판의 반동으로 전해오는 충격... 그때 깜짝 놀랐다. 총을 쏘는 사람도 온몸으로 개머리판의 반동으로 인한 충격을 버티어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현대의 전쟁 무기의 발전은 그 충격까지도 완전히 덜어낼 만큼 진화했다. 개머리판 반동을 버틸 필요 없이 그냥 미사일 버튼 하나만 누르면 되니까... 그렇게 점점 전쟁의 참혹함에 인간은 무뎌진다. 그 둔감함은 무관심의 시간 속에서 정신을 녹슬게 한다. 쇠에 녹이 스는 것처럼... 양국 간의 전쟁 소식을 접하는 제삼자도 강 건너 불구경하듯 전쟁 소식을 접한다. 걸프 전쟁(1990)과 이라크 전쟁(2003)을 떠올려 보면 세계 각국은 뉴스를 통해 마치 게임을 접하듯 전쟁을 간접 경험했다.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의 상흔도 세대를 이어져 남을 것이다. 인류가 진화하고 무기체계가 고도화될수록 사람은 더 쉽게 더 많이 죽는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저 멀리 과거로 되돌리지 않아도 한국전쟁(1950)이 그러했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모두 그러했다.

미군 군인이 이라크 시민을 검문하는 사진 (로이터통신, GORAN TOMASEVIC)

 

대규모 전쟁과 살상의 시발점이 되었던 철기시대의 사람들은 전쟁과 도처에 널려 있는 죽음을 목도하면서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 이러한 맥락에서 반가사유상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역사의 수레바퀴 어느 한 지점이었던 철의 시대 옛 선조들은 폭력과 전쟁을 겪으면서 삶과 죽음을 깊이 사유하게 되지 않았을까. 피와 권력, 광기와 전쟁의 쳇바퀴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이 굴레에서 벗어날 길은 어디인지... 또한 이 반복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역사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면서 제국의 흥망성쇠도 그 이름만 바뀔 뿐 계속해서 되풀이되고, 지배와 피지배로 나누어져 아우성치는 아수라의 현실에서 철기시대의 인간은 구원의 길을 찾고 싶었을 것이다.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구원의 길을 찾아 헤매는 건, 끊임없는 '제자리걸음'이고 무한 반복의 '도돌이표'이다. 대신 그때 철기 시대의 사람들은 구원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람을 죽이는 데 쓰였던 '쇠붙이'를 녹여 만든 불상을 통해서... 

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반가사유상

반가사유상은 어린아이의 형상과 여성스러운 곡선이 합쳐진 모습이다. '사유의 방'에 전시되어 있는 반가사유상 두 점을 정면으로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에 있는 반가사유상은 상대적으로 어린아이의 얼굴로 보였고, 왼쪽에 있는 반가사유상은 좀 더 여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상대의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나이를 가늠한다. 얼굴형이 전체적으로 둥글고 얼굴의 상위부가 넓으면 어린아이, 턱을 포함한 아랫부위가 도드라져 각이 지면 나이가 든 어른이라고 볼 수 있다. 얼굴의 윤곽뿐만 아니라 주름의 정도도 나이에 따른 인물이 간직한 세월의 흔적을 보여준다. 미술품 전문가의 소견을 빌리자면, 반가사유상은 10세 정도의 어린이아의 얼굴이라고 한다. 그도 그런 것이 현재 열 살과 아홉 살인 아들과 딸을 목욕시키며 등을 밀어준 적이 있는데, 두 아이의 둥글납작한 어깨와 매끈한 등은 반가사유상의 뒷모습과 유사했다.

반가사유상 두 점, 각각 정면을 기준으로 왼쪽과 오른쪽

반가사유상은 전체적인 외형 곳곳에 유연하고 부드러운 곡선미가 흐른다. 인간 문명이 일구어낸 건축의 모습은 주로 직선의 형태이다. 찌르고 자르고 구분 짓고 나눈다. 인간 문명의 상징인 직선은 그 선명한 위용으로 지배와 피지배 간에 경계선을 긋고 그 위로 쌓아 올린 건축으로 오늘날까지 우뚝 서 있지만, 그 안에는 직선의 비정함이 깃들어있다. 반면 곡선은 자연의 특징을 나타낸다. 굽이쳐 흐르는 강과 산 능선의 모습은 정형화되지 않은 곡선의 형태이다. 이 곡선미가 반가사유상 표면의 매끄러움과 더해져 전체를 감돌고 있다.

 

그리고 미소(微笑)... '작은 웃음'

 

억겁으로 반복되는 인간 굴레의 수레바퀴에서 반가사유상은 미소짓고 있다. 이 신비로운 미소는 말 그대로 신비스러워서 웃음과 슬픔이 동시에 흐르는 것 같다. 개인적인 느낌으로 오른쪽 반가사유상의 미소는 웃음이 좀 더 흐르는 것 같고, 왼쪽 반가사유상에는 슬픔이 좀 더 흐르는 것 같았다. 웃음과 슬픔이 감도는 이 미소는 관람하는 사람을 멈추게 하고 바라보게 한다. 반가사유상의 눈은 완전히 감은 것이 아니라 지그시 눈을 감은 형상이다. 지그시 눈을 감았지만, 살짝 눈을 뜨고 있다. 외부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를 동시에 바라보는 것이 명상이라고 했던가. 

 

이 명상하는 모습의 반가사유상 두 점을 돌고 돌며 바라보았다. 사유의 방의 바닥은 살짝 기울어져 있다. 완곡한 기울어짐을 따라 관람객의 발걸음도 자연스레 반가사유상을 중심으로 빙그르 돌도록 설계되었다. 반가사유상 위쪽에는 별빛처럼 수많은 조명등이 설치되어 있는데 '숫자 8'을 그리고 있다. 숫자 8을 직접 써보면 시작점과 끝 점이 일치한다. 시작점으로 다시 돌아가는 숫자가 8이다. 숫자 8은 여러 문화권에서 그 특징을 나타내기도 한다. 기독교 성서에선 조물주가 7일 만에 천지만물을 창조한다. 제8일은 질서가 새롭게 시작되는 날이다. 그래서 '8'은 ''시작', '회복', '재생', '부활'을 상징한다. 불교에선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으로 팔정도를 강조한다. 자주 쓰는 한자성어 '칠전팔기'(七顚八起)는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선다'는 의미이다.

반가사유상 위 숫자 8

시작점과 끝점이 수 없이 맞물리며 돌아가는 수레바퀴는 우리의 살아가는 인생이며 반복되는 역사이다. 이 무한반복의 제자리 걸음에서 홀연히 멈추어 오른발을 왼쪽 무릎에 얹고 오른손을 살짝 빰에 댄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상...

 

사유하는 자세로 앉은 반가사유상은 내면의 세계와 외부의 세계의 문을 동시에 열고 작은 웃음을 짓고 있다. 나에게 주어진 인생이 무한으로 반복된다면 나도 저렇게 작은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나도 저런 작은 웃음을 슬픔의 눈물 대신 흘릴 수 있을까. 눈물 같은 작은 웃음을 지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에서 처럼 '모든 존재와 에너지가 반복되어 왔으며, 무한한 시간을 가로질러 무한한 횟수로 계속 반복될 것이라면...' 나는 그러한 삶에서 작은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사유의 방에서 반가사유상을 돌고 돌며 이런 사유를 해보았다. 

 

사유의 방에서 반가사유상은 숫자 8이 내리비치는 조명 아래에서 사유하는 모습으로 작은 미소를 짓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인생이 영원 무한으로 반복된다면... 정말 그렇다면 나는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작은 응답을 보내는 것 같았다. 그 사유의 모습과 응답 같은 옅은 미소가 철기시대를 살았던 옛 사람들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위안과 구원이 되리라 믿는다.

 

반가사유상을 마지막으로 관람하고 박물관 밖을 나왔다.

중앙국립박물관 야경 풍경

 

 

집으로 돌아와 반가사유상 관람 후기를 거실에서 쓰며 문득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둥글 납작한 어깨와 등... 모든 걸 재미와 놀이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평범하고 소중한 일상을 기록했다. 아이들의 존재에 감사하며 작은 웃음을 짓는다.

 

'작은 웃음'이라는 제목의 시로 반가사유상 관람 후기를 마무리 짓는다.

 


작은 웃음(微笑) 

 

 

큰 구슬과 작은 구슬이 어지럽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빙그르르 굴려보는

작은 웃음

두 눈으로 두 가지 세계를 동시에 들여다보며, 빙긋이 굴려보는

작은 웃음 

빙글빙글 무한 반복의 수레바퀴에서, 마침내 짓는

작은 웃음

 

버릇없이 다리 꼰 어른이

10살 얼굴 드러내고

둥글납짝 어깨와 등 여성스레 드러내어 짓는

작은 웃음

 

어지러운 되풀이에서, 풀어서 내보이는

구슬 웃음

 

빙글빙글 빙그르르 

빙글 웃음  

 

 

- 박 상 민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