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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기고/시를 품은 수필

[가을은 길을 덮는다]

by 한송이 안개꽃 2023. 11. 30.


[가을은 길을 덮는다]

 

가을은 길을 덮는다

있었던 길 익숙했던 길을 덮는다

원래 길이라는 게 없었음을 정신없이 차곡차곡 보여준다

 

성실한 떨굼으로

가지런한 눈알 위에 눈꺼풀이 덮이고

도미노처럼 쏠리는 몸동작은 

느닷없이 혼자가 된다

 

눈길은 빼곡히 가리고

발길은 모두 열어준다

 

나무와 나무 사이는 모두 길이라는 걸

성실한 떨굼으로

모든 땅에 가벼운 도장을 찍어 먼저 보여준다

그 모든 도장을 살 떨리게 밟을 수 있음을 허락한다

 

그렇게 가을은 길을 덮고

몸소 자유가 된다

 

- 박 상 민 -

수원 장안구 숙지산 가을 산책길

 

 

수필

[가을은 길을 덮는다]

 

가을은 길을 걷게 하는 계절이다. 푸른 하늘과 가을바람 그리고 낙엽은 발걸음을 나아가게 한다. 그날도 산책길을 따라 강아지와 뒷산을 올랐다. 가을이 깊어감에 따라 산길은 낙엽으로 수북이 덮여 있었다. 차곡차곡 쌓인 낙엽으로 인위적으로 조성된 산책길과 그렇지 않은 자연스러운 산의 경계가 아리송하게 다가왔다. 원래 있었던 길, 익숙했던 길은 아주 묘하게 경계가 모호했다. 너무나 익숙했던 산길에서 몸에 익어버린 움직임이 자꾸만 멈칫멈칫했다. 뻔히 알고 있는 길 위에서 느닷없이 길을 잃은 것 같은...

 

낯익은 길이 순식간에 낯설어졌다. 가지런했던 머릿속은 순간 핑~ 어지러워지고 가벼웠던 발걸음에는 묵직함이 감돌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어디로 가야 할지를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고민 없이 나아갔는데, 그날은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에 선택의 무게감이 오롯이 실리었다. 가을이 빼곡히 덮어버린 길 위에서 익숙함으로 눌러 놓았던 두려움이 어지럽게 피어올랐고 묵직하게 선택하는 발걸음이 그 어지러움을 받쳐 올렸다. 

 

그렇게 익숙한 듯 낯설어져 있는 가을 산길에서 나는 느닷없이 멈추어버린 도미노가 되어버렸다. 정해놓은 길만 쫓아 앞으로만 쏟아지듯  나아가는 시선 위로 메마른 살갗 같은 낙엽이 가볍게 그리고 겹겹이 내려앉았다. 그만 무거워진 눈꺼풀은 철커덕 닫히고... 꼭두각시처럼 끌려갔던 발걸음은 묵직하게 자유로움을 마주한다.

 

모든 경계가 아리송해진 공간에서 당혹스럽게만 펼쳐진 풍경이 새롭게 다가왔다. 눈길은 모두 덮여있고 발길은 모두 열려있는 것으로 다가왔다. 나무와 나무 사이는 모든 것이 길로 보였다. 가을은 어쩌면 원래 길이라는 게 없었음을 자신의 성실한 떨굼으로 차곡차곡 빼곡히 보여주는 것 같았다. 펼쳐진 모든 땅을 밟고 나아갈 수 있음을 먼저 가벼운 도장을 빈틈없이 찍어 허락하고 있었다. 그 모든 도장을 살 떨리게 밟을 수 있음을... 가을은 그렇게 눈길은 가리고 발길은 모두 열어주었다. 

 

그렇게 가을은 길을 덮고

몸소 자유가 된다. 

 

 

- 박 상 민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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