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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품은수필64

[꽃길] 시[꽃길]  만개한 꽃을 보고활짝 기쁘지 못한 것은 언젠가 떨어질 꽃이라는 걸 알아서이다 떨어지는 꽃을 보고살짝 맘이 아렸던 것은아름다움이 다 한 때라는 걸 알아서이다 그래서 사진을 찍고그래서 전화를 걸고그래서 달달한 걸 먹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시시하게 헤매는 길에서꽃은 길이 되어 있고길은 꽃이 되어 있다 꽃은걷는 자에게 길로서 다시 피어있다 걷는 자를 위해 몰래 피었다가걷는 자를 위해 미리 피어 내린다그렇게 꽃길을 걷는다  - 박 상 민 - 수필[꽃길을 걷는다] 여기저기 핀 봄꽃을 보며 반가웠지만, 가슴 한구석엔 조바심이 미세하게 끓어올랐다. 저렇게 핀 꽃이 금방 떨어질 거란 걸 알고 있어서일 것이다. 꽃답던 나이가 지나갔음을 안팎으로 숱하게 직감하는 자는 저마다 비슷한 감정을 느낄 거라 본다. 집 주.. 2024. 4. 11.
[가을은 길을 덮는다] 시 [가을은 길을 덮는다] 가을은 길을 덮는다 있었던 길 익숙했던 길을 덮는다 원래 길이라는 게 없었음을 정신없이 차곡차곡 보여준다 성실한 떨굼으로 가지런한 눈알 위에 눈꺼풀이 덮이고 도미노처럼 쏠리는 몸동작은 느닷없이 혼자가 된다 눈길은 빼곡히 가리고 발길은 모두 열어준다 나무와 나무 사이는 모두 길이라는 걸 성실한 떨굼으로 모든 땅에 가벼운 도장을 찍어 먼저 보여준다 그 모든 도장을 살 떨리게 밟을 수 있음을 허락한다 그렇게 가을은 길을 덮고 몸소 자유가 된다 - 박 상 민 - 수필 [가을은 길을 덮는다] 가을은 길을 걷게 하는 계절이다. 푸른 하늘과 가을바람 그리고 낙엽은 발걸음을 나아가게 한다. 그날도 산책길을 따라 강아지와 뒷산을 올랐다. 가을이 깊어감에 따라 산길은 낙엽으로 수북이 덮여 있었다.. 2023. 11. 30.
[두 번 피는 꽃_ReFlower] 시 [두 번 피는 꽃_ReFlower] 두 번 피는 꽃이 있다 꽃 피는 봄이 지났건만 겨울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다시 피는 꽃이 있다 계절을 착각하고 흐름을 역행하고 섭리에 반란을 일으키며 피는 꽃이 있다 나비도 벌도 없이 피는 꽃이 있다 이슬보단 된서리 산들바람보단 싸늘함 속에 피는 꽃이 있다 봄을 예고하는 신호탄이 아닌 제 뒤통수를 치며 튀어나온 오발탄같이 피는 꽃이 있다 활짝 피지 못하고 반짝 살랑거리지 못하고 생뚱 보드랍지 못하고 버둥 그저 꽃이고 싶어서 꼭 다시 한번 꽃이고 싶어서 그렇게 피는 꽃이 있다 - 박 상 민 - 수필 [두 번 피는 꽃_ReFlower] 40대 중반, 안으로 보나 밖으로 보나 영락없는 아저씨이지만, 나는 발레를 시작했다. 집 주변 여러 발레 학원을 문의했지만 시작이 순탄하.. 2023. 11. 23.
[혹부리 아빠] 시 [혹부리 아빠] 아빠가 된다는 건 어쩌면 혹부리 영감이 되는 일 치렁치렁 무게감 대롱대롱 책임감 영감님 어깨도 축축 늘어지고 무서워도 도깨비 만나 뚝딱! 혹 떨어지는 상상 솔직히 달콤해 몹쓸 상상에도 아랑곳없이 혹은 쑥쑥 자라고 어디를 가도 치렁치렁 무얼 해도 대롱대롱 혹부리 영감 노랫소리는 혹주머니에서 나온다는데 흥얼흥얼 콧노래부터 불러보자 혹을 대롱 달고 부르고 혹을 치렁 차고 부르자 혹을 껴안고도 부르고 혹을 감싸고도 부르자 혹을 받쳐 올려가며 불러보자 혹이 복(福)이 되는 요술은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라 치렁치렁 대롱대롱 줄기차게 불러대는 노랫소리에 있었다고 동네방네 노래 부르고 다녀보자 - 박 상 민 - 수필 [혹부리 아빠] 육아를 한다는 건 때론 혹부리 영감이 되는 일 같다. 첫째 육아를 한.. 2023. 7. 1.
[피어내림] 시 [피어내림] 피어올렸다가 피어내림 수직으로 피어올렸다가 수평으로 피어내림 하늘 높이 피어올렸다가 땅으로 널리 피어내림 바람 맞으며 피어올렸다가 바람 따라 피어내림 딱! 한번 피어올렸다가 뚝! 하고 피어내림 두 손 모아 피어올렸다가 두 팔 벌려 피어내림 여기 모여 피어올렸다가 여기 저기 피어내림 제자리에서 피어올렸다가 제모습으로 피어내림 꽃처럼 피어오르내렸다가 언젠가 다시 꽃답게 피어내려올림 - 박 상 민 - 감사합니다. 2023. 4. 20.
[매화가 피는 자리] 시 [매화가 피는 자리] 겨울이 지난 자리 매화가 피는 자리 창문을 여는 자리 매화가 피는 자리 향기가 나는 자리 매화가 피는 자리 하늘로 피어 올렸다가 땅으로 피어 내린다 땅으로 스며 들었다가 내 맘으로 스며든다 다시 어느 겨울 끝자락에 여닫이 창문 열어 오래 간직한 은은한 향 떨리는 손으로 불어 보낸다 - 박 상 민 - 감사합니다. 수필 [매화가 피는 자리] 겨울 방학이 끝나고 등교하는 날, 아이들 학교 배웅을 하는 산책길에서 매화나무 옆을 지나다가 아들에게 문득 말했다. "아빠는 이 맘때가 되면 매화가 피길 기다려." "응 나는 여름 방학이 오길 기다려." 초등학교 어린이다운 대답에 한 참을 웃었다. 역시 아이의 세계는 사뭇 다르다. 계절을 뛰어 넘어 시간을 앞지르며 달리는 아이의 말에 유쾌했고 매.. 2023. 4. 20.
[피어올림] 시 [피어올림] 딱 제 키까지만 피어올림 딱 제 몸통만큼만 피어올림 더 높지 않아도 더 넓지 않아도 제자리에서 피어올림 제 모습으로 피어올림 나머지는 향기가...... 나머지는 향기가... - 박 상 민 - 감사합니다. 2023. 3. 23.
[하늘 낚시] 시 [하늘 낚시] 하늘에 바람이 부는 날 낚시를 하러 가자 하얀 실을 풀어 푸른 하늘을 휘~휘저어 보자 팽팽한 입질이 오면 실을 더 풀어 물고기를 더 놓아주자 푸른 하늘이 걸려들 때까지 미끼가 월척이 될 때까지 - 박 상 민 - 수필 [연날리기와 낚시] 수원 화성 동쪽에 위치해 있는 창룡문은 연날리기 명소이다. 굳이 바람 부는 날이 아니어도 이곳을 방문하면 넓은 잔디밭에서 연을 날리는 노인과 아이를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바람이 부는 어느 날, 아내와 아이들과 창룡문으로 연을 날리러 갔다. 형형색색의 연이 긴 꼬리를 우아하게 펼치며 하늘을 날고 있었다. 솟구치는 바람도 한몫해서인지 아이들이 잡고 있는 연도 날아오르고 싶어 안달이 난 듯 펄떡펄떡 날뛰는 것 같았다. 마치 물 밖으로 끄집어낸 물고기 마냥.... 2023. 1. 30.
[그릇에 담긴 물] 시 [그릇에 담긴 물] 물은 안도했다 그릇 안에 기대었다 물은 도착했다 물 그 자체로 머물 곳에 얼음 되어 송곳으로 찌를 살벌함 없이 오물 되어 더럽히려는 심보 없이 물이 그릇에 담기었다 그릇 안에 감돌며 그릇을 빚졌던 손길에 뺨을 비비고 그릇을 끌어안았던 가슴에 가득 안기고 그릇을 굳게 했던 불길을 기억했다 그릇에 담긴 물은 그렇게 그릇에 담기어 물이 되었다 - 박 상 민 - 수필 [그릇에 담긴 물] 자존심, 자만심 그리고 자신감, 자존감... 이 네 단어는 서로 교차하며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각각 제 갈 길로 갈라져 극명하게 차이를 드러낸다. 우선 공통점은 한자어 자(自)이다. 자존심(自尊心)이든 자만심(自慢心)이든 혹은 자신감(自信感 )이든 자존감(自尊感)이든 모두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네 가.. 2023. 1. 12.
[사람의 가슴 안에] 시 [사람의 가슴 안에] 눈이 다가가기 전에 가슴에 먼저 담긴 사진 카메라 셔터가 찰칵하기 전에 작살에 먼저 꽂힌 사진 이미지로 저장하기 전에 이미 보관된 사진 인화해서 앨범 속에 간직하기 전에 벌써 기록된 사진 사진(寫眞), 벗기고 베껴도 다다를 수 없는 알맹이, 아이의 손으로 잡을 수 없었던 흰나비와 노랑나비 몸짓에 달아나는 나비는 눈짓만을 허락하고 그물을 꺼내는 동작에 유유히 빠져나가는 아름다운 월척 기껏 건져 올린, 어쩌다 얻어걸린 못마땅한 물고기와 피라미들 수없이 삭제하고 애써 타협한 한 녀석을 온갖 도구로 손질해도 살아서 날뛰던 그놈을 평면 도마에서 살려낼 순 없고 멀어져 간 월척을 한숨으로 뒤늦은 배웅 하며 털썩 주저앉는다 비린내 나는 사진들은 빈손으로 훌훌 털리우고... 이제 가슴 속 사진.. 2023. 1. 10.
[결정체] 시 [결정체]  빛나기로 되어있다 떠다니는 구름 속에서 운명을 믿었다휩쓸리는 바람 속에서 결정을 내렸다 빗자루에 내몰리고흙탕물을 뒤집어써도 빛나기로 결정된 몸이라는 걸... 운명이 날리듯 내리고소복이 쌓이고뽀드득 소리 낸다 - 박 상 민 -  수필[결정체] 눈 결정체를 보았다. 계단을 오르는 난간 손잡이에 소복이 쌓여있는 눈이었다. 살짝 얼어 있어 눈 알갱이가 선명했고 사이사이 작은 공간에서 하얗고 조용한 숨을 내쉬고 있는 것 같았다. 곤히 잠든 아이를 깨우지 않는 발걸음으로 다가가 눈맞춤했다. 일정하고 고요한 공간 속 조그마한 어딘가에, 작아도 또렷이 새겨져 있는 빛이 결정(結晶)되어 있었다.  눈맞춤하기 전부터... 눈이 쌓이기 전부터... 바람에 날리기 전부터... 구름에서 내리기 전부터... 떠다.. 2022. 12. 28.
[징검다리] 시 [징검다리] 덮치는 물살에 휩쓸리지 않고 밟히는 무게에 가라앉지 않고 던져진 듯 놓여있다 오래전 그 자리에 어쩌다 이 자리에 사뿐사뿐 내딛는 발자국을 듬성듬성 받쳐 올린다 물이 흘러가라고...... 발이 지나가라고...... 홍수에 떠내려가지 않고 발꿈치에 눌려 잠기지 않고 물이 흘러가라고... 발이 지나가라고... - 박 상 민 - 수필 [징검다리] 심리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선생님과 상담을 마치고 나오면 주변에 시냇물을 따라 이어진 산책길을 걸었다. 산책 시작 길에서는 시냇물을 거슬러 올라가고, 돌아오는 길에선 시냇물을 따라 내려왔다. 물을 거슬러 올라갈 땐 내딛는 발걸음도 저항감을 느꼈다. 겹겹이 포개어진 지난 기억들을 조심히 들춰보며 약간 쓰라리고 약간 아찔하고 점점 아득했다. 지난 시간을 .. 2022. 12. 27.
[동행] 시[동행] 동행을 해주고 싶다과거의 나를 만나면 인사도 말도 없이동행을 해주고 싶다 위로도 조언도 없이동행을 해주고 싶다 눈빛이 이야기귀가 청진기입술은 미소가 되어동행을 해주고 싶다 혼자 앉은 벤치와혼자 걷는 길에서 36.5˚C만 전해지는그런 동행을 해주고 싶다 - 박 상 민 - 수필[동행] 10여 년 전 살았던 장소에 혼자 우연히 들렀다. 여전한 모습과 새로운 모습이 같은 풍경 속에서 편안해 보였다. 오고 가는 길에서... 그때 그곳에서 살았던 내가 오고 가는 게 보였다. 흐릿했던 기억들이 점점 선명하게 돋아났다. 여러 장의 흑백 사진에 채색이 되면서 입체적인 추억으로 살아 움직였다. 다시 만나는 아내는 한결같았고 아이들은 귀여웠다. 익숙했던 길을 걸으며 '과거의 나를 지금의 내가 우연히.. 2022. 12. 5.
[가을본색(本色)] 시 가을본색(本色) 본색(本色)을 드러낼 때가 되었다 다 같이 초록이었던 시절 그 이전부터 제일 먼저 시작되었던 색 빛이 저물고 다 같이 어둠 속에서도 어둠 너머로 간직하고 있었던 색 그 色을 온전히 들어 올려 밖으로 낸다 천천히 대수롭지 않게 제자리에서 - 박 상 민 - 수필 가을본색(本色) 초롱초롱 이슬을 머금은 연둣빛 봄을 지났다. 이윽고 초록의 여름. 그리고 가을. 이른 아침 가을 길을 걷고 있다. 여기저기 사방팔방 제각각 떨어져 있어도 낙엽 잎 놓인 길을 걸을 땐 어지러움이 없다. 사뿐사뿐 내딛는 발걸음엔 무게감이 실리지만, 오히려 몸은 가벼워진다. 대각선으로 꽂히는 볕이 그늘과 분명한 경계를 이룬다. 서늘함에서 따사로움으로 발걸음은 접어든다. 아침 햇살과 함께 올려다본 나무는 저마다 제각각 색.. 2022. 11. 17.
[옛날을 걷는 사람] 시 [옛날을 걷는 사람] 옛날 살았던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예스러움에 예(禮)를 다하는 마음으로 몸을 세우고 오른발과 왼발은 규칙적인 시옷(ㅅ)이 되어 사람(人)이 걸어간다 변해있는 풍경 속에서 변함없는 하늘과 땅을 기준 삼고 어지러움 없이 여기저기를 어지럽게 돌아다닌다 버스 터미널과 담벼락, 골목길과 거리, 시장과 학교... 발걸음(ㅅ)은 걸음걸음마다 예(禮)를 다하고 살아가고 살아내고 살게 했던 모든 이의 걸음에 ㅅ(시옷) 표시를 하며 걸어간다 예스러운 길을 두 다리 걷어붙여 머리 위로 받쳐 올려 걸어간다(ㅅ) 그 옛날을 다시 걷는 사람(人)이 예로서 받쳐 올려 걸어간다 - 박 상 민 - 수필 [옛날을 걷는 사람] 한글은 표음문자이지만 특정 문자를 보면 그림이 연상된다. 자음 ㅅ(시옷)이 그렇다. '.. 2022. 9. 26.
[측면의 아름다움] 시 [측면의 아름다움] 옆에서 바라보며 느꼈지 너의 아름다움을 정면만 바라보는 너는 구석구석 못마땅함에 거울 속 나르시시즘은 애로시즘이 되지 못했지 옆에서 바라보며 느꼈지 너의 아름다움을 속눈썹과 눈동자 둥근 코와 이마의 점 측면의 아름다움과 함께 나란히 잡았던 손과 같이 걸었던 길과 함께 바라본 풍경은 다시 너의 측면을 아름답게 했지 언젠가는 알게되겠지 그 이상의 아름다움을 지닌 너라는 걸 정면을 홀로 바라보며 오래된 뜨거움으로 새롭게 끌어안은 너 자신을 측면에서 안아주며 입 맞출래 - 박 상 민 - 수필 [측면의 아름다움]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아름답다"라는 문구를 보며 약간의 거북함이 들었던 적이 있다. '왜 더 아름답다는 거지?', '자신을 억지로 미화하는 거 아닌가?' '굳이 그럴.. 2022. 8. 16.
[비빔밥 비벼지는 소리] 시 [비빔밥 비벼지는 소리] "아빠! 비빔밥 비벼지는 소리 좀 들어봐" 아이들에게 비빔밥을 비벼주며 근심 가득 아빠가 머릿속 사발에 생각을 이리저리 비비고 있다가 울렸던 소리 "아빠! 비빔밥 비벼지는 소리 좀 들어봐" 찰지게 시뻘겋게 윤기 나게 비벼지는 비빔밥에 고소하게 피어오르는 냄새 의도하지 않은 아이의 흔들어 깨움에 눈 껍질이 떨어지고 귓문이 열리고 콧구멍은 비로소 살아있는 현실을 쫓는다 대수롭지 않은 일상의 경험이 귓구멍과 콧구멍 세포 속에 새겨진다 이제 입으로 비빔밥 들어오는 소리 아이 입에도 비빔밥 들어가는 소리 - 박 상 민 - 수필 [비빔밥 비벼지는 소리] 때론 머릿속에 근심걱정이 가득할 때가 있다. 뒤숭숭한 정신 상태로 부모라는 책임감에 떠밀려 몸뚱이는 마지못해 밥상을 차리고 있었다. 오.. 2022. 7. 20.
[어깨동무] 시 [어깨동무] 우리는 어깨동무 어깨 높이 맞추었네 높고 낮음 존재해도 우리는 어깨동무 둥글 납작 어깨 어깨 마주 대고 서 있으면 얼굴마다 푸른 동산 사이좋게 웃고 있네 - 박 상 민 - 수필 [어깨동무] 산 능선을 바라볼 때 어깨동무가 떠오른다. 나에게 산 능선의 모습은 '산이 서로 어깨동무'하는 모습이다. 높고 낮음은 존재해도 서로 이어져 흐르듯 굳건한 모습을 보면 어찌나 정겨운지... 앞다투어 치솟은 빌딩보다 서로의 높낮이가 있으면서도, 그 엄격함이 부드러운 선으로 녹아내린 걸 바라보는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누군가의 어깨를 짓누르고 내가 잘나려고 하는 마음도, 나의 어깨를 짓누르고 올라가는 걸 바라보는 억울함도 없이 말이다. 산 능선의 어깨동무는 그런 어깨이다. 서로를 세워주는 어깨, 서로를 이.. 2022. 7. 4.
[카페에서] 시 [카페에서] 한 몸뚱이를 이리저리 주고받으며 사이좋게 싸우듯 걸어왔을 두 발이... 기도할 때 말고는 좀처럼 만나지도 않고 엇갈렸을 두 손이... 잠시만 네 다리가 되자고 약속하고 조용히 먼저 앉아 있다 이윽고 직립 보행의 피곤함과 복잡함이 빈 테이블 위에 메뉴로 올려진다 달달한 맛과 씁쓸한 맛이 뒤섞여 정체 몰라지고 꽉 찬 소음 속으로 한 줄기 소음을 빈틈없이 섞어본다 지치지도 않고 채워지지도 않음이 유일한 배경이다 스스로 걸어버린 마법이 시간을 따라 스르륵 풀리면 네 다리는 살짝 흐트러지고 다시 두 발과 두 손이 되어 연기처럼 사라진다 처음처럼 멍하니 먼저 기다리고 있는 네 다리는 지금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 박 상 민 - 승형이 카페(합정 티라미수)에서 수필 [카페에서] 카페.. 2022. 6. 16.
[비포장도로] 시 [비포장도로] 짓눌리고 굳어져 나를 밟고 지나가는 놈들은 덜컹거리게 해 주겠다는 심술이 저렇게 돋았다 추위가 오고 얼음이 얼어 완고한 고집이 누워있다가도 일어난다 대수롭지 않은 일상의 걸음걸이에서 만난 비포장도로에... 작은 입김과 따뜻한 눈길을 일상의 호흡처럼 보낸다 - 박 상 민 - 수필 [비포장도로와 습관] 습관이란 건 참 무섭다. 내가 한 말과 행동이 굳어져 습관이 된다. 이후에 그 습관대로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 반복적인 말과 행동은 운명을 결정짓는 힘을 갖고 있다. 매일의 삶에서, 삶의 길 위에서 어떠한 자취를 남기느냐를 스스로 살피는 건 중요해 보인다. 자기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그 길을 그대로 걷고 있는 자신을 종종 발견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는 길을 잘 살펴 땅을 평탄하게 하.. 2021. 12. 3.
[괜찮아라는 말은...] 시 [괜찮아라는 말은...] 짧은 세 마디로 너의 영혼에 다가가는 말 짧은 세 마디로 나의 영혼을 굳건히 다지는 말 괜찮아? 괜찮아! 세 번의 노크로 문 손잡이를 돌리는 말 세 마디 메아리가 비스듬히 열린 문으로 나와 너와 나를 마침내 안심시키는 말 괜...찮...아...라는 말은 너의 어제를 이해하고 너의 오늘을 격려하는 말 나의 어제를 위로하고 나의 오늘을 미래로 연결하는 말 괜찮아~ - 박 상 민 - 수필 [괜찮아라는 말은...] 아들이 머리를 두 번이나 다쳤다. 한 번은 동네 어떤 아이가 무심코 던진 벽돌에 맞아서이고, 다른 한 번은 나의 실수로 침대 옆 모서리에 머리가 부딪쳐서이다. 아들은 머리에 피를 꽤 많이 흘렸다. 몇 주 간격으로 일어난 일이라 여러 차례 병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초등학생.. 2021. 12. 3.
[시든 꽃] 시[시든 꽃]  시들어도 찌들어도,씨 들어 있는꽃으로서 다시 피어나리라  - 박 상 민 -  수필[시든 꽃]  시들어 있는 꽃이 있다. 나에겐 어머니가 그렇다. 빛을 떠나보내고 시들어버리지 않으려 마른 꽃잎을 끝끝내 버리지 않고 있다. 버리지 못할 꽃잎을 끌어안고 안으로만 안으로만 말라 간다. 풍만한 젖가슴에서 바람이 빠지고 눅진한 할미 냄새가 겹겹이 쌓여, 이제 눈빛은 하나의 눈물 방울이 되어 간다. 어머니의 얼굴과 피부는 시들었고 삶은 찌들었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한 송이 꽃으로서 살아가신다. 길가에 시든 꽃을 보며 어머니를 떠올렸다. 모든 꽃이 그렇듯 자연스레 시든 꽃이지만, 그 안에는 새로운 생명의 씨(seed)가 들어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다시 바라보았다.  시들어도 찌들어도,씨 들어있는 꽃으로서.. 2021. 12. 3.
[나무와 귀耳] 시[나무와 귀耳] 가지가 잘려 나가고귀가 생겼다 찌르는 칼이 떨어지고바람을 들인다 핏줄 돋은 뿌리가땅을 움켜쥐고 푸른 머리 들어 올려하늘로 향한다 - 박 상 민 -  수필 [나무와 귀耳] '나무에게 귀가 있다'라고 나는 믿는다.  가지치기를 한 자리가 나에게는 '나무의 귀'로 보인다. 잘린 부위에서 옴폭 들어가 있는 모양새가 사람의 귀를 떠올리게 한다. 길을 걷다 마주한 나무에게서 귓구멍 자국의 개수를 헤아려보고 생김새를 종종 관찰해본다. 가지치기는 분명 나무에게 느닷없이 가해지는 고통일 것이다. 톱이나 낫으로 몸뚱아리 일부가 잘리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적절한 시점에서 전지를 해주지 않는다면, 햇빛 투과율이 낮아지고 병충해에 시달리며 연약한 상태로 계속 생장하게 되어, 과실나무의 경우 열매를 잘 맺지 .. 2021. 12. 3.
[누나가 있다는 건...] 시 [누나가 있다는 건...] 누나가 있다는 건... 주먹을 휘두르는 형이 없다는 것 대신 덤빌 만한 형이 생긴다는 것 덤비다가 할큄, 꼬집힘, 발길질을 당하는 것 당하고는 못살아 형 같은 누나의 머리채를 쥐어뜯고 늘어지는 것 늘어나는 말싸움과 몸싸움을 하며 치사하고 치열하게 자라는 것 자라면서 소녀의 세계를 접하는 것 인형, 순정만화, 거울, 치마, 머리카락, 고무줄, 그리고 수다... 그리고 눈물... 눈물에 겁먹으며 놀리고 소녀의 환상과 동경을 거부하고 쫓으며, 여자의 걱정과 나약함에 강한 남자를 꿈꾸는 것 꿈을 깨어서는 여성의 강인함에 풀썩 기대는 것 기대며 어느새 페미니즘과 함께 걸어가는 것 걷다가 문득 바라본 거울에서, '여자로 태어났다면...' 어땠을 나의 모습과 삶을 상상하는 것 상상력으로.. 2021. 7. 11.
[친구의 얼굴] 시 [친구의 얼굴] 우두커니 서 있는 곳에서 긴 의자에 홀로 앉아 있는 곳에서 한 몸뚱이를 들고 이리저리 넘겨받으며 걸어가고 있는 두 발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만난다 현실의 등살에 밀어 넣고 제쳐두고 시간의 어지러움에 접어 두고 그만 넘겨버렸다지만,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그리움은 친구를 비추는 조각이 되고 거울이 되어 선명한 얼굴을 만난다 화석처럼 살아있는 얼굴을 마주한다 우리는 그렇게 다시 만난다 공간이 돌고 돌아 시간이 겹겹이 포개어져 옛날처럼 장난처럼 우연인 듯 다시 만날 그날... 조각이 된 거울로 너의 얼굴을 비출게 - 박 상 민 - 수필 [친구의 얼굴] 시간이 지날수록 좋은 건 술과 친구이다.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는 않지만, 어느 날 문득 친구를 마주하게 된다. 지난 시간들이 통째로 혹은 은근슬.. 2021. 7. 8.
[화(火)에서 화(花)로] 시[화(火)에서 화(花)로]  제주도 화산섬화(火)가 났던 섬  화가 식고 바람이 불고 바람이 불어풀이 돋았네  풀 밑으로 또 다른 화(花)가나 있고  화(火)에서 태어나화(花)로 피어난 '너'를'ㅓ' 모음에 손가락 걸어'나'가는 길로 열어줄래  - 박 상 민 -  수필[화(火)에서 화(花)로]  제주도는 화산섬이다. 화(火)가 대단히도 많이 났던 섬인가 보다. 그 옛날 용암의 흔적은 지금 몇백 개나 되는 오름이 되었고, 기암괴석과 동굴이 되었고, 한라산이 되었다. 이 모두가 제주 섬이다.  화산 폭발과 용암의 흔적들이 남긴 웅장한 자연의 풍광과 신비함을 바라보면서, 지난날 화(火)가 났었던 이 섬이 내 안에서 자꾸만 헤아려졌다. 그건 내 안에 분노의 불길이 자꾸만 다가가는 목적지 같았다. 2월의 제주는.. 2021. 6. 24.
[파도가 지나간 자리] 시 [파도가 지나간 자리] 성실한 파도의 호흡으로 자리가 만들어진다 파도의 들숨과 날숨으로 모래 캔버스가 펼쳐진다 밟히고 허물어진 자리를 쓸고 닦는 애달픔으로 비벼댄다 반반한 모래 가슴이 놓인 자리에서 손가락 하나로 그림을 그리고, 이름을 쓰고, 모래성을 쌓는다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서... - 박 상 민 - 수필 [파도가 지나간 자리] 해운대 바닷가에서 파도를 보았다. 파도가 하는 일을 살펴보고 파도가 일으키는 소리를 들어 보았다. 파도는 참 성실하다. 백사장 여기저기를 얼마나 줄기차고 힘차게 내달리는지... 파도가 치는 이유를 찾아본 적이 있다. 태양과 지구와 달이 일직선일 때, 바다는 부풀어 올라 밀물이 되고, 일직선이 아닐 때 지구의 원심력이 강해지면서 썰물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전체적인 바다의 .. 2021. 6. 16.
[바람을 본다] 시 [바람을 본다] 나부끼는 깃발에서 바람을 본다 혼자 도는 바람개비에서 바람을 본다 떠다니는 구름에서 바람을 본다 흔들리는 나뭇잎에서 바람을 본다 날리는 머리카락에서 바람을 본다 바람이 불어 깃발을 본다 바람이 불어 바람개비를 본다 바람이 불어 구름을 본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을 본다 바람이 불어 나를 본다 바람이 불어, 너를 본다 - 박 상 민 - 수필 [바람을 본다] 파주 평화누리공원을 '바람의 언덕'이라 부른다. 지리적으로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다. 여기저기 불어오는 바람에 몸이 시원했고 오래 많은 바람을 쐬다 보니 기분이 얼얼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을 따라 이것저것이 보인다. 그날 그곳에서 바람을 따라 본 것은 '깃발', '바람개비', 구름', '나뭇잎', '연', '머리카락' 등이다. '깃발'.. 2021. 5. 31.
[장미와 가시] 시 [장미와 가시] 왜 붉은색이니? 가시를 품고 있었던 거니? 가시에 찔렸던 거야? 붉은 피가 흘렀던 거야? 혹시 그런 거라면, 너의 가시에 찔려 피 한 방울이 나더라도 자기의 가시를 끌어안으며 꽃을 피운 너라고 믿을게 그런 너라고 믿을게 - 박 상 민 - 수필 [장미와 가시] 아내가 아파트 베란다에 장미를 키우고 있다. 아파트 담벼락에도 군데군데 들장미가 피어있다. 여름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장미를 마주하는 5월이다. 봄꽃을 보내고 아파트 안팎으로 붉은 장미를 보며, 장미의 '붉은색'과 '가시'를 헤아려 보았다. 장미에게서 느낀 헤아림을 '의지'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싶다. 그것도 '사랑받겠다는 의지'... 장미는 나에게 '의지의 꽃'이다. 장미는 대체로 붉다. 장미는 화려하다. 그리고 장미에는 가시가 있.. 2021. 5. 30.
[심장에게, Dear My Heart] [심장에게, Dear My Heart] 숨이 가빠졌을 때 알게 되었어 네가 거기 있다는걸 문을 두드리는지 신호를 보내는지 가슴이 따끔거리다가 이내 간지러워져 '그래 네가 거기 있었구나' 정중앙에서 살짝 비켜 앉아 나에게 자리를 양보해주었구나 이제 숨이 가쁘지 않아도 네가 날 토닥여주고 있다는 걸 너의 쿵쾅거림이 나의 시작임을 잊지 않을게 친애하는 나의 심장에게, 너에게로 향하는 문을 연다 안에서 밖으로 너에게서 나에게로 - 박 상 민 - 2021. 4.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