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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길] 시[꽃길]  만개한 꽃을 보고활짝 기쁘지 못한 것은 언젠가 떨어질 꽃이라는 걸 알아서이다 떨어지는 꽃을 보고살짝 맘이 아렸던 것은아름다움이 다 한 때라는 걸 알아서이다 그래서 사진을 찍고그래서 전화를 걸고그래서 달달한 걸 먹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시시하게 헤매는 길에서꽃은 길이 되어 있고길은 꽃이 되어 있다 꽃은걷는 자에게 길로서 다시 피어있다 걷는 자를 위해 몰래 피었다가걷는 자를 위해 미리 피어 내린다그렇게 꽃길을 걷는다  - 박 상 민 - 수필[꽃길을 걷는다] 여기저기 핀 봄꽃을 보며 반가웠지만, 가슴 한구석엔 조바심이 미세하게 끓어올랐다. 저렇게 핀 꽃이 금방 떨어질 거란 걸 알고 있어서일 것이다. 꽃답던 나이가 지나갔음을 안팎으로 숱하게 직감하는 자는 저마다 비슷한 감정을 느낄 거라 본다. 집 주.. 2024. 4. 11.
[매화가 피는 자리] 시 [매화가 피는 자리] 겨울이 지난 자리 매화가 피는 자리 창문을 여는 자리 매화가 피는 자리 향기가 나는 자리 매화가 피는 자리 하늘로 피어 올렸다가 땅으로 피어 내린다 땅으로 스며 들었다가 내 맘으로 스며든다 다시 어느 겨울 끝자락에 여닫이 창문 열어 오래 간직한 은은한 향 떨리는 손으로 불어 보낸다 - 박 상 민 - 감사합니다. 수필 [매화가 피는 자리] 겨울 방학이 끝나고 등교하는 날, 아이들 학교 배웅을 하는 산책길에서 매화나무 옆을 지나다가 아들에게 문득 말했다. "아빠는 이 맘때가 되면 매화가 피길 기다려." "응 나는 여름 방학이 오길 기다려." 초등학교 어린이다운 대답에 한 참을 웃었다. 역시 아이의 세계는 사뭇 다르다. 계절을 뛰어 넘어 시간을 앞지르며 달리는 아이의 말에 유쾌했고 매.. 2023. 4. 20.
[그릇에 담긴 물] 시 [그릇에 담긴 물] 물은 안도했다 그릇 안에 기대었다 물은 도착했다 물 그 자체로 머물 곳에 얼음 되어 송곳으로 찌를 살벌함 없이 오물 되어 더럽히려는 심보 없이 물이 그릇에 담기었다 그릇 안에 감돌며 그릇을 빚졌던 손길에 뺨을 비비고 그릇을 끌어안았던 가슴에 가득 안기고 그릇을 굳게 했던 불길을 기억했다 그릇에 담긴 물은 그렇게 그릇에 담기어 물이 되었다 - 박 상 민 - 수필 [그릇에 담긴 물] 자존심, 자만심 그리고 자신감, 자존감... 이 네 단어는 서로 교차하며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각각 제 갈 길로 갈라져 극명하게 차이를 드러낸다. 우선 공통점은 한자어 자(自)이다. 자존심(自尊心)이든 자만심(自慢心)이든 혹은 자신감(自信感 )이든 자존감(自尊感)이든 모두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네 가.. 2023. 1. 12.
[사람의 가슴 안에] 시 [사람의 가슴 안에] 눈이 다가가기 전에 가슴에 먼저 담긴 사진 카메라 셔터가 찰칵하기 전에 작살에 먼저 꽂힌 사진 이미지로 저장하기 전에 이미 보관된 사진 인화해서 앨범 속에 간직하기 전에 벌써 기록된 사진 사진(寫眞), 벗기고 베껴도 다다를 수 없는 알맹이, 아이의 손으로 잡을 수 없었던 흰나비와 노랑나비 몸짓에 달아나는 나비는 눈짓만을 허락하고 그물을 꺼내는 동작에 유유히 빠져나가는 아름다운 월척 기껏 건져 올린, 어쩌다 얻어걸린 못마땅한 물고기와 피라미들 수없이 삭제하고 애써 타협한 한 녀석을 온갖 도구로 손질해도 살아서 날뛰던 그놈을 평면 도마에서 살려낼 순 없고 멀어져 간 월척을 한숨으로 뒤늦은 배웅 하며 털썩 주저앉는다 비린내 나는 사진들은 빈손으로 훌훌 털리우고... 이제 가슴 속 사진.. 2023. 1. 10.
[결정체] 시 [결정체]  빛나기로 되어있다 떠다니는 구름 속에서 운명을 믿었다휩쓸리는 바람 속에서 결정을 내렸다 빗자루에 내몰리고흙탕물을 뒤집어써도 빛나기로 결정된 몸이라는 걸... 운명이 날리듯 내리고소복이 쌓이고뽀드득 소리 낸다 - 박 상 민 -  수필[결정체] 눈 결정체를 보았다. 계단을 오르는 난간 손잡이에 소복이 쌓여있는 눈이었다. 살짝 얼어 있어 눈 알갱이가 선명했고 사이사이 작은 공간에서 하얗고 조용한 숨을 내쉬고 있는 것 같았다. 곤히 잠든 아이를 깨우지 않는 발걸음으로 다가가 눈맞춤했다. 일정하고 고요한 공간 속 조그마한 어딘가에, 작아도 또렷이 새겨져 있는 빛이 결정(結晶)되어 있었다.  눈맞춤하기 전부터... 눈이 쌓이기 전부터... 바람에 날리기 전부터... 구름에서 내리기 전부터... 떠다.. 2022. 12. 28.
[징검다리] 시 [징검다리] 덮치는 물살에 휩쓸리지 않고 밟히는 무게에 가라앉지 않고 던져진 듯 놓여있다 오래전 그 자리에 어쩌다 이 자리에 사뿐사뿐 내딛는 발자국을 듬성듬성 받쳐 올린다 물이 흘러가라고...... 발이 지나가라고...... 홍수에 떠내려가지 않고 발꿈치에 눌려 잠기지 않고 물이 흘러가라고... 발이 지나가라고... - 박 상 민 - 수필 [징검다리] 심리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선생님과 상담을 마치고 나오면 주변에 시냇물을 따라 이어진 산책길을 걸었다. 산책 시작 길에서는 시냇물을 거슬러 올라가고, 돌아오는 길에선 시냇물을 따라 내려왔다. 물을 거슬러 올라갈 땐 내딛는 발걸음도 저항감을 느꼈다. 겹겹이 포개어진 지난 기억들을 조심히 들춰보며 약간 쓰라리고 약간 아찔하고 점점 아득했다. 지난 시간을 .. 2022. 12. 27.
[동행] 시[동행] 동행을 해주고 싶다과거의 나를 만나면 인사도 말도 없이동행을 해주고 싶다 위로도 조언도 없이동행을 해주고 싶다 눈빛이 이야기귀가 청진기입술은 미소가 되어동행을 해주고 싶다 혼자 앉은 벤치와혼자 걷는 길에서 36.5˚C만 전해지는그런 동행을 해주고 싶다 - 박 상 민 - 수필[동행] 10여 년 전 살았던 장소에 혼자 우연히 들렀다. 여전한 모습과 새로운 모습이 같은 풍경 속에서 편안해 보였다. 오고 가는 길에서... 그때 그곳에서 살았던 내가 오고 가는 게 보였다. 흐릿했던 기억들이 점점 선명하게 돋아났다. 여러 장의 흑백 사진에 채색이 되면서 입체적인 추억으로 살아 움직였다. 다시 만나는 아내는 한결같았고 아이들은 귀여웠다. 익숙했던 길을 걸으며 '과거의 나를 지금의 내가 우연히.. 2022. 12. 5.
[가을본색(本色)] 시 가을본색(本色) 본색(本色)을 드러낼 때가 되었다 다 같이 초록이었던 시절 그 이전부터 제일 먼저 시작되었던 색 빛이 저물고 다 같이 어둠 속에서도 어둠 너머로 간직하고 있었던 색 그 色을 온전히 들어 올려 밖으로 낸다 천천히 대수롭지 않게 제자리에서 - 박 상 민 - 수필 가을본색(本色) 초롱초롱 이슬을 머금은 연둣빛 봄을 지났다. 이윽고 초록의 여름. 그리고 가을. 이른 아침 가을 길을 걷고 있다. 여기저기 사방팔방 제각각 떨어져 있어도 낙엽 잎 놓인 길을 걸을 땐 어지러움이 없다. 사뿐사뿐 내딛는 발걸음엔 무게감이 실리지만, 오히려 몸은 가벼워진다. 대각선으로 꽂히는 볕이 그늘과 분명한 경계를 이룬다. 서늘함에서 따사로움으로 발걸음은 접어든다. 아침 햇살과 함께 올려다본 나무는 저마다 제각각 색.. 2022. 11. 17.
[옛날을 걷는 사람] 시 [옛날을 걷는 사람] 옛날 살았던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예스러움에 예(禮)를 다하는 마음으로 몸을 세우고 오른발과 왼발은 규칙적인 시옷(ㅅ)이 되어 사람(人)이 걸어간다 변해있는 풍경 속에서 변함없는 하늘과 땅을 기준 삼고 어지러움 없이 여기저기를 어지럽게 돌아다닌다 버스 터미널과 담벼락, 골목길과 거리, 시장과 학교... 발걸음(ㅅ)은 걸음걸음마다 예(禮)를 다하고 살아가고 살아내고 살게 했던 모든 이의 걸음에 ㅅ(시옷) 표시를 하며 걸어간다 예스러운 길을 두 다리 걷어붙여 머리 위로 받쳐 올려 걸어간다(ㅅ) 그 옛날을 다시 걷는 사람(人)이 예로서 받쳐 올려 걸어간다 - 박 상 민 - 수필 [옛날을 걷는 사람] 한글은 표음문자이지만 특정 문자를 보면 그림이 연상된다. 자음 ㅅ(시옷)이 그렇다. '.. 2022. 9. 26.
[측면의 아름다움] 시 [측면의 아름다움] 옆에서 바라보며 느꼈지 너의 아름다움을 정면만 바라보는 너는 구석구석 못마땅함에 거울 속 나르시시즘은 애로시즘이 되지 못했지 옆에서 바라보며 느꼈지 너의 아름다움을 속눈썹과 눈동자 둥근 코와 이마의 점 측면의 아름다움과 함께 나란히 잡았던 손과 같이 걸었던 길과 함께 바라본 풍경은 다시 너의 측면을 아름답게 했지 언젠가는 알게되겠지 그 이상의 아름다움을 지닌 너라는 걸 정면을 홀로 바라보며 오래된 뜨거움으로 새롭게 끌어안은 너 자신을 측면에서 안아주며 입 맞출래 - 박 상 민 - 수필 [측면의 아름다움]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아름답다"라는 문구를 보며 약간의 거북함이 들었던 적이 있다. '왜 더 아름답다는 거지?', '자신을 억지로 미화하는 거 아닌가?' '굳이 그럴.. 2022. 8. 16.
[비빔밥 비벼지는 소리] 시 [비빔밥 비벼지는 소리] "아빠! 비빔밥 비벼지는 소리 좀 들어봐" 아이들에게 비빔밥을 비벼주며 근심 가득 아빠가 머릿속 사발에 생각을 이리저리 비비고 있다가 울렸던 소리 "아빠! 비빔밥 비벼지는 소리 좀 들어봐" 찰지게 시뻘겋게 윤기 나게 비벼지는 비빔밥에 고소하게 피어오르는 냄새 의도하지 않은 아이의 흔들어 깨움에 눈 껍질이 떨어지고 귓문이 열리고 콧구멍은 비로소 살아있는 현실을 쫓는다 대수롭지 않은 일상의 경험이 귓구멍과 콧구멍 세포 속에 새겨진다 이제 입으로 비빔밥 들어오는 소리 아이 입에도 비빔밥 들어가는 소리 - 박 상 민 - 수필 [비빔밥 비벼지는 소리] 때론 머릿속에 근심걱정이 가득할 때가 있다. 뒤숭숭한 정신 상태로 부모라는 책임감에 떠밀려 몸뚱이는 마지못해 밥상을 차리고 있었다. 오.. 2022. 7. 20.
[어깨동무] 시 [어깨동무] 우리는 어깨동무 어깨 높이 맞추었네 높고 낮음 존재해도 우리는 어깨동무 둥글 납작 어깨 어깨 마주 대고 서 있으면 얼굴마다 푸른 동산 사이좋게 웃고 있네 - 박 상 민 - 수필 [어깨동무] 산 능선을 바라볼 때 어깨동무가 떠오른다. 나에게 산 능선의 모습은 '산이 서로 어깨동무'하는 모습이다. 높고 낮음은 존재해도 서로 이어져 흐르듯 굳건한 모습을 보면 어찌나 정겨운지... 앞다투어 치솟은 빌딩보다 서로의 높낮이가 있으면서도, 그 엄격함이 부드러운 선으로 녹아내린 걸 바라보는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누군가의 어깨를 짓누르고 내가 잘나려고 하는 마음도, 나의 어깨를 짓누르고 올라가는 걸 바라보는 억울함도 없이 말이다. 산 능선의 어깨동무는 그런 어깨이다. 서로를 세워주는 어깨, 서로를 이.. 2022. 7. 4.
[비포장도로] 시 [비포장도로] 짓눌리고 굳어져 나를 밟고 지나가는 놈들은 덜컹거리게 해 주겠다는 심술이 저렇게 돋았다 추위가 오고 얼음이 얼어 완고한 고집이 누워있다가도 일어난다 대수롭지 않은 일상의 걸음걸이에서 만난 비포장도로에... 작은 입김과 따뜻한 눈길을 일상의 호흡처럼 보낸다 - 박 상 민 - 수필 [비포장도로와 습관] 습관이란 건 참 무섭다. 내가 한 말과 행동이 굳어져 습관이 된다. 이후에 그 습관대로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 반복적인 말과 행동은 운명을 결정짓는 힘을 갖고 있다. 매일의 삶에서, 삶의 길 위에서 어떠한 자취를 남기느냐를 스스로 살피는 건 중요해 보인다. 자기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그 길을 그대로 걷고 있는 자신을 종종 발견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는 길을 잘 살펴 땅을 평탄하게 하.. 2021. 12. 3.
[시든 꽃] 시[시든 꽃]  시들어도 찌들어도,씨 들어 있는꽃으로서 다시 피어나리라  - 박 상 민 -  수필[시든 꽃]  시들어 있는 꽃이 있다. 나에겐 어머니가 그렇다. 빛을 떠나보내고 시들어버리지 않으려 마른 꽃잎을 끝끝내 버리지 않고 있다. 버리지 못할 꽃잎을 끌어안고 안으로만 안으로만 말라 간다. 풍만한 젖가슴에서 바람이 빠지고 눅진한 할미 냄새가 겹겹이 쌓여, 이제 눈빛은 하나의 눈물 방울이 되어 간다. 어머니의 얼굴과 피부는 시들었고 삶은 찌들었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한 송이 꽃으로서 살아가신다. 길가에 시든 꽃을 보며 어머니를 떠올렸다. 모든 꽃이 그렇듯 자연스레 시든 꽃이지만, 그 안에는 새로운 생명의 씨(seed)가 들어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다시 바라보았다.  시들어도 찌들어도,씨 들어있는 꽃으로서.. 2021. 12. 3.
[나무와 귀耳] 시[나무와 귀耳] 가지가 잘려 나가고귀가 생겼다 찌르는 칼이 떨어지고바람을 들인다 핏줄 돋은 뿌리가땅을 움켜쥐고 푸른 머리 들어 올려하늘로 향한다 - 박 상 민 -  수필 [나무와 귀耳] '나무에게 귀가 있다'라고 나는 믿는다.  가지치기를 한 자리가 나에게는 '나무의 귀'로 보인다. 잘린 부위에서 옴폭 들어가 있는 모양새가 사람의 귀를 떠올리게 한다. 길을 걷다 마주한 나무에게서 귓구멍 자국의 개수를 헤아려보고 생김새를 종종 관찰해본다. 가지치기는 분명 나무에게 느닷없이 가해지는 고통일 것이다. 톱이나 낫으로 몸뚱아리 일부가 잘리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적절한 시점에서 전지를 해주지 않는다면, 햇빛 투과율이 낮아지고 병충해에 시달리며 연약한 상태로 계속 생장하게 되어, 과실나무의 경우 열매를 잘 맺지 .. 2021. 12. 3.
[누나가 있다는 건...] 시 [누나가 있다는 건...] 누나가 있다는 건... 주먹을 휘두르는 형이 없다는 것 대신 덤빌 만한 형이 생긴다는 것 덤비다가 할큄, 꼬집힘, 발길질을 당하는 것 당하고는 못살아 형 같은 누나의 머리채를 쥐어뜯고 늘어지는 것 늘어나는 말싸움과 몸싸움을 하며 치사하고 치열하게 자라는 것 자라면서 소녀의 세계를 접하는 것 인형, 순정만화, 거울, 치마, 머리카락, 고무줄, 그리고 수다... 그리고 눈물... 눈물에 겁먹으며 놀리고 소녀의 환상과 동경을 거부하고 쫓으며, 여자의 걱정과 나약함에 강한 남자를 꿈꾸는 것 꿈을 깨어서는 여성의 강인함에 풀썩 기대는 것 기대며 어느새 페미니즘과 함께 걸어가는 것 걷다가 문득 바라본 거울에서, '여자로 태어났다면...' 어땠을 나의 모습과 삶을 상상하는 것 상상력으로.. 2021. 7. 11.
[친구의 얼굴] 시 [친구의 얼굴] 우두커니 서 있는 곳에서 긴 의자에 홀로 앉아 있는 곳에서 한 몸뚱이를 들고 이리저리 넘겨받으며 걸어가고 있는 두 발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만난다 현실의 등살에 밀어 넣고 제쳐두고 시간의 어지러움에 접어 두고 그만 넘겨버렸다지만,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그리움은 친구를 비추는 조각이 되고 거울이 되어 선명한 얼굴을 만난다 화석처럼 살아있는 얼굴을 마주한다 우리는 그렇게 다시 만난다 공간이 돌고 돌아 시간이 겹겹이 포개어져 옛날처럼 장난처럼 우연인 듯 다시 만날 그날... 조각이 된 거울로 너의 얼굴을 비출게 - 박 상 민 - 수필 [친구의 얼굴] 시간이 지날수록 좋은 건 술과 친구이다.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는 않지만, 어느 날 문득 친구를 마주하게 된다. 지난 시간들이 통째로 혹은 은근슬.. 2021. 7. 8.
[파도가 지나간 자리] 시 [파도가 지나간 자리] 성실한 파도의 호흡으로 자리가 만들어진다 파도의 들숨과 날숨으로 모래 캔버스가 펼쳐진다 밟히고 허물어진 자리를 쓸고 닦는 애달픔으로 비벼댄다 반반한 모래 가슴이 놓인 자리에서 손가락 하나로 그림을 그리고, 이름을 쓰고, 모래성을 쌓는다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서... - 박 상 민 - 수필 [파도가 지나간 자리] 해운대 바닷가에서 파도를 보았다. 파도가 하는 일을 살펴보고 파도가 일으키는 소리를 들어 보았다. 파도는 참 성실하다. 백사장 여기저기를 얼마나 줄기차고 힘차게 내달리는지... 파도가 치는 이유를 찾아본 적이 있다. 태양과 지구와 달이 일직선일 때, 바다는 부풀어 올라 밀물이 되고, 일직선이 아닐 때 지구의 원심력이 강해지면서 썰물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전체적인 바다의 .. 2021. 6. 16.
[장미와 가시] 시 [장미와 가시] 왜 붉은색이니? 가시를 품고 있었던 거니? 가시에 찔렸던 거야? 붉은 피가 흘렀던 거야? 혹시 그런 거라면, 너의 가시에 찔려 피 한 방울이 나더라도 자기의 가시를 끌어안으며 꽃을 피운 너라고 믿을게 그런 너라고 믿을게 - 박 상 민 - 수필 [장미와 가시] 아내가 아파트 베란다에 장미를 키우고 있다. 아파트 담벼락에도 군데군데 들장미가 피어있다. 여름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장미를 마주하는 5월이다. 봄꽃을 보내고 아파트 안팎으로 붉은 장미를 보며, 장미의 '붉은색'과 '가시'를 헤아려 보았다. 장미에게서 느낀 헤아림을 '의지'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싶다. 그것도 '사랑받겠다는 의지'... 장미는 나에게 '의지의 꽃'이다. 장미는 대체로 붉다. 장미는 화려하다. 그리고 장미에는 가시가 있.. 2021. 5. 30.
[심장에게, Dear My Heart] [심장에게, Dear My Heart] 숨이 가빠졌을 때 알게 되었어 네가 거기 있다는걸 문을 두드리는지 신호를 보내는지 가슴이 따끔거리다가 이내 간지러워져 '그래 네가 거기 있었구나' 정중앙에서 살짝 비켜 앉아 나에게 자리를 양보해주었구나 이제 숨이 가쁘지 않아도 네가 날 토닥여주고 있다는 걸 너의 쿵쾅거림이 나의 시작임을 잊지 않을게 친애하는 나의 심장에게, 너에게로 향하는 문을 연다 안에서 밖으로 너에게서 나에게로 - 박 상 민 - 2021. 4. 7.
[아이스케키] 시 [아이스케키] 그때 그 시절 고무줄놀이하는 여자애들의 치마를 들처 올리는 장난질을 할 때면, 왜 "아이스케키~"라고 외쳤을 까? ​ ​ ​ 짓궂은 걸 알면서도 할퀴는 듯한 눈초리를 나 몰라라 했던 아이스케키 놀이 달달했던 놀이 ​ ​ ​ 끝끝내 울음을 터뜨리는 계집아이와 도망칠 찰나 등짝이 할퀴고 팔뚝이 꼬집혀 골목길 뒤켠에서 우는 사내아이 ​ ​ ​ 달달하면서도 짭짤했던 아이스케키 놀이 ​ ​ ​ 좀 처럼 보기 힘든 골목길 아닌 어떤 길가에서 ​ ​ ​ 꽃이 바람 따라 피고 벌이 꽃을 따라 날고 ​ ​ ​ 또 다시 달달한 어지러움을 따라 조심히 올려다본 꽃치마 속엔 이제는 수줍은 웃음만 담겨있구나 ​ ​ ​ "정말 미안했어!" "너무 달달해서 그만..." ​ ​ ​ 달달함을 핑계 삼으면 너의 눈물을.. 2021. 4. 6.
[실타래] 시 [실타래] 꼬인 실타래 꼬이고 꼬인 내 마음 ​ ​ 꼬인 실타래를 풀 듯 내 마음도 풀어주고 싶어 ​ ​ 배배 꼬인 부분을 찾아 살살살 얽히고설킨 내 마음을 찾아 살살살 ​ ​ 꼬인 실타래를 찾았지만, 꼬인 내 마음을 찾았지만, 너무 꼬여버린 실타래 너무 꼬여버린 내 마음 ​ ​ 실타래를 포기하기엔 남은 실이 아까워 꼬인 마음을 포기하기엔 남은 삶이 소중해 가위를 들었다 ​ ​ 가위로 꼬인 실타래를 자르고 머리털을 잘랐다 ​ ​ 잘려 나간 실타래와 잘려 나간 머리털을 뒤로하고 까까머리 까슬까슬 매만지며 긍정적인 수치를 안으로 새긴다 ​ ​ - 박 상 민 - 감사합니다. 2021. 4. 6.
[형광등에서 영생(永生)까지] [형광등에서 영생(永生)까지] 빛은 생명이고 어둠은 죽음이라 치자 ​ ​ 환한 방 안에 빛이 깜빡깜빡한다 어둠이 느껴진다 ​ ​ 나는 형광등을 교체한다 아~ 환하다 ​ ​ 그런데 다시 방 안이 깜빡깜빡한다 다시 어둠이 느껴진다 ​ ​ 나는 빛이 있는 다른 방으로 이동한다 아~ 환하다 ​ ​ 그런데 다시 깜빡깜빡한다 다시 어둠이 느껴진다 ​ ​ 밖을 보니 아직 낮이고 환하다 그래서 나는 밖으로 나간다 정말 환하다 더 환하다 환한 곳에서 나는 환하다 ​ ​ 그렇게 있다가 조금씩 어두워진다 또다시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 ​ 이제 나는 처음 형광등을 갈아끼는 손길로 더 환한 방으로 이동하는 발길로 환한 밖으로 걸어가는 몸짓을 더해가며 이제 빛이 비취는 곳을 향해 눈길을 보낸다 ​ ​ 그리고 빛을 향해 걷는다 이.. 2021. 4. 6.
[연고를 발라 줄게] [연고를 발라 줄게] 넘어졌니? 긁었니? 뭐가 낫니? '그럼 연고를 발라 줄게' ​ ​ 피가 나요! 가려워요! 뭐가 났어요! '그럼 연고를 발라 줄게' ​ ​ 한 번만이 아니고 두 번 세 번... ​ ​ 오늘만이 아니고 내일도 모레도 아니면 그다음 날도 ​ ​ 연고도 발라주고 따뜻한 입김으로 "호~"도 해줄게 ​ ​ 상처에 연고를 발라 주며 아이에게 있을 마음에 상처에도 연고를 발라 주고 싶었다 ​ ​ 한 번만이 아니고 두 번 세 번... ​ ​ 오늘만이 아니고 내일도 모레도 아니면 그다음 날도 ​ ​ 상처가 흉한 터가 되지 않게 따뜻한 입김으로 "호~"도 해줄게 ​ ​ ​ - 박 상 민 - ​ 2021. 4. 6.
[이름만 부를게] [이름만 부를게] 성은 진이요 이름은 달래야 ​ ​ 성은 민이요 이름은 들레야 ​ ​ 공식적인 이름 석 자에서 이제부터 성을 때고 이름만 불러볼 게 ​ ​ 달래야 들레야 ​ ​ 학교에서 선생님이 출석부로 이름을 부를 때 들리던 이름 석 자 ​ ​ 친구가 되면 성(姓)이 없어 남녀로 나뉘는 성(性)이 없어 너와 나를 막던 성(城)이 없어 ​ ​ 이름으로만 만나고 이름으로만 놀고 이름으로만 헤어졌었지 ​ ​ 매년 다시 만나는 친구에게 고맙고 정겨운 친구에게 이제부터는 이름만 불러볼 게 ​ ​ 달래야 들레야 ​ ​ 성 한자 때고 이름만 불러보니 내 성도 툭 떨어져 나가 이름 하나만 꽃처럼 피어있네 ​ ​ ​ - 박 상 민 - ​ 2021. 4. 6.
[아빠 아저씨] [아빠 아저씨] 나는 아저씨 같은 아빠이고 싶다 ​ ​ ​ 내 아이들에게 "저 사람도 그냥 한 명의 아저씨야" 라는 느낌이 드는 그런 아빠였으면 좋겠다 ​ ​ ​ 이 세상의 수많은 아저씨들 중에 참 괜찮은 아저씨 ​ ​ ​ "그 아저씨가 우리 아빠야"라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 ​ ​ ​ - 박 상 민 - 시를 품은 수필 ​ [아빠 아저씨] ​ 내가 우리 아버지를 한 사람의 아저씨로 본 나이는 32살 즈음이었다. 그날따라 역정 내시는 아버지의 얼굴이, 생전 처음 보는 어떤 낯선 아저씨의 화내는 얼굴로 보였다. 한 5초간 그래 보였다. 그냥 어떤 아저씨가 내 앞에서 화를 내는 것이었다. 그냥 어떤 아저씨가 무슨 무슨 일로 화가 단단히 나신 모양이었다. 한 5초의 시각이 지나고 그 아저씨가 바로 나의 아버지.. 2021. 4. 6.
[춤바람] [춤바람] 등나무에 누워 춤바람난 나무들을 바라본다 ​ ​ ​ 춤이 바람 같고 바람이 춤 같다 ​ ​ ​ 나무가 춤을 출 때 춤, 바람, 나무는 같은 말이 된다 ​ ​ ​ 같이, 함께, 그리고 홀로 저마다 춤을 춘다 ​ ​ ​ 촐랑거리며 하늘거리며 저렇게 같이, 저렇게 함께, 저렇게 홀로 춤을 춘다 ​ ​ ​ 나도 이렇게 같이, 이렇게 함께, 이렇게 홀로 춤을 춘다 ​ ​ ​ 발가락을 꼼지락거려 뿌리내리고 뻣뻣한 허리 그대로 두고 촐랑거려라 머리카락아 하늘거려라 속눈썹아 ​ ​ - 박 상 민 - 2021. 4. 6.
[층간소음] [층간소음] 층간소음아! 층간소음아! 고마워~ ​ ​ 내 집이 내 집이 아니란 걸 알려 줘서 ​ ​ 층간소음아! 층간소음아! 고마워~ ​ ​ 좁은 소유의 공간에서 드넓은 자유의 공간으로 불러줘서 ​ ​ 자꾸 알려 줘 그리고 자주 불러 줘 층간소음아~ - 박 상 민 - 2021. 4. 6.
[추락하는 얼굴] [추락하는 얼굴] 벚꽃은 하늘을 향해 피지 않고 땅을 향해 피어 있다 ​ ​ ​ 추락을 내려다보며 추락할 곳을 향해 피어 있다 ​ ​ ​ "떨어지는 게 무섭지 않니?" ​ ​ ​ 추락하는 얼굴은 그저 환하다 ​ ​ ​ 떨어질 곳이 어디든 추락하는 얼굴은 그저 환하다 ​ ​ ​ - 박 상 민 - ​ ​ 2021. 4. 6.
[꽃의 무게] [꽃의 무게] 목련꽃 툭! 떨어지는데 꽃잎 무거워 스스로 떨어지는지 꽃잎 무거워 나무가 떨어뜨리는지... ​ ​ 벚꽃 휙~ 날리는데 꽃잎 가벼워 날리는지 꽃잎 가벼워 나무가 날려 보내는지... ​ ​ 후두둑 떨어진 꽃잎이 썩어질 동안 휘리릭 날린 꽃잎이 날리는 동안 ​ ​ 썩어 없어지지 않고 바람에 날리어 빗물에 젖어 풍화되어 산화되어 땅속에 스며들길... ​ ​ - 박 상 민 - 2021. 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