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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기고/시를 품은 수필

[지팡이]]

by 한송이 안개꽃 2021. 4. 2.

[지팡이]

 

 

 

 

 

또박또박 땅을 짚어가며

걸음을 옮기신다

 

 

 

 

묵직하고도 낭랑한 지팡이 소리에

잠들었던 대지도 이제 숨을 쉰다

 

 

 

 

죽은 냉가슴 같던 대지에 청진기를 대듯

꾹꾹 눌러보시며 두루두루 살피신다

 

 

 

 

발맞추지 못하고 서로 불안했던 오른발과 왼발도

이제는 안도하고 지팡이의 인도를 받는다

 

 

 

 

우리 할미와 할비의 지팡이 소리에

높은 산은 머리를 숙이고

출렁이는 파도는 뒷걸음질을 치고

옹졸했던 오르막길은 지평선이 되고

추락하던 내리막길은 할미 할비 등에 포근히 업힌다

 

 

 

 

홍해를 갈랐던 모세의 지팡이도

목자 다윗이 노래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도

우리 할미 할비의 저 자그마한 지팡이도

억겁(億劫)의 세월의 힘으로 침묵의 대지에 말뚝을 박는다

 

 

 

 

또박또박 땅을 짚어가며

오늘도 걸음을 옮기신다

 

 

 

 

 

- 박 상 민 -

위안부할머니 지팡이 사진

 

 

[수요시위와 지팡이]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 소식을 라디오로 접한 적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수요시위가 1000회째를 맞이 했다는 소식이었다. 1992년 시작된 이 수요시위는 2021년 현재 1500회를 훌쩍 넘겼다. 30년째 수요시위가 이어지면서 같은 주제로 열리는 세계 최장 시위라고 한다. 그만큼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 위안부 문제는 일본 정부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사죄하지 않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정부에 등록된 240명의 할머니 중 대부분 고령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시고, 현재 열네(14) 분 만이 생존해계신다.

 

 

당시 라디오에서 종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육성 인터뷰와 집회 소식을 접하며 어안이 벙벙했다. 전쟁의 역사와 폭력이 한 개인을 할퀴고 간 흔적에 놀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연히 일어나 하나둘 모여 의연하게 집회를 이어나가는 할머니들의 모습과 주위 관계자분들의 의지에 또한 놀랐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없이 나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자신의 아픔과 함께 일어나 세상에 전해주는 그분들의 아픈 이야기는 인간의 존엄과 고귀함을 생각하게 한다.

 

 

라디오 소식을 다 듣고 아찔한 전율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때 우연히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가시는 어느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들어왔다. 조용한 골목길엔 지나가는 할머니와 서 있는 나, 이렇게 두 사람만 있었다. 걸음걸이는 느리셨지만, '탕! 탕!' 땅에 부딪히며 나는 낭랑한 지팡이 소리가 유난히 내 귓전에 울렸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증폭을 더해오는 지팡이 소리를 듣고 있으니 내 가슴까지 '쿵! 쿵!' 진동이 전해졌다. 둔탁한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묵직하게 자신의 무게를 실어 땅에 말뚝을 박는 소리 같기도 했다. 지팡이 소리를 다 듣고 다시 집으로 들어와 "지팡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다.

 

 

그날의 지팡이는 나에게 말 없는 아픔을 꾹꾹 눌러보고 보살피는 의사의 청진기 같았다. 지팡이는 분명 나약한 자들의 것이다. 누군가의 아픔으로 나는 나의 아픔을 깨닫는다. 그리고 나의 아픔으로 나는 누군가의 아픔을 헤아린다. 아픈 곳을 짚어 내려가는 할머님들의 손길에, 이 시를 받치며 나의 작은 손길을 더한다.

 

 

 

 

 

- 박 상 민 -

파주 평화누리공원 소녀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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