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옛날을 걷는 사람]
옛날 살았던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예스러움에 예(禮)를 다하는 마음으로
몸을 세우고 오른발과 왼발은
규칙적인 시옷(ㅅ)이 되어
사람(人)이 걸어간다
변해있는 풍경 속에서
변함없는 하늘과 땅을 기준 삼고
어지러움 없이 여기저기를 어지럽게 돌아다닌다
버스 터미널과 담벼락, 골목길과 거리, 시장과 학교...
발걸음(ㅅ)은 걸음걸음마다
예(禮)를 다하고
살아가고 살아내고 살게 했던
모든 이의 걸음에 ㅅ(시옷) 표시를 하며 걸어간다
예스러운 길을
두 다리 걷어붙여
머리 위로 받쳐 올려 걸어간다(ㅅ)
그 옛날을
다시 걷는 사람(人)이
예로서 받쳐 올려 걸어간다
- 박 상 민 -
수필
[옛날을 걷는 사람]
한글은 표음문자이지만 특정 문자를 보면 그림이 연상된다. 자음 ㅅ(시옷)이 그렇다. 'ㅅ'을 보면 한자의 사람 인(人)과 모양새가 비슷하다. 한자어 사람 인(人)은,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 있는 모습이기도 하고 한 사람이 두 발로 걷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다. 한글 자음의 'ㅅ'은 그러한 뜻은 없고 그저 소리를 담은 표음문자이지만, 어쨌거나 그 모양새가 한자 사람 인(人)과 닮아 있다. 마치 사람이 걷고 있는 모습처럼...
옛날 살았던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흑백 사진에 색을 칠하는 마음으로 여행을 떠났다. 오래된 친근함을 대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래도 변해버린 풍경 속에서 발걸음은 여기저기를 헤맬 수밖에 없었다. 엄마의 손을 잡고 걸었던 길을 이제 엄마의 나이가 되어 혼자 걸으니, 기억 속에만 있던 그 희미하고도 단순했던 길은 꼬부랑꼬부랑 미로가 되어 있었다. 옛날을 다시 걷는 발걸음은 정처 없이 늘어지고 중간중간 갈피를 잃었지만, 왠지 하나도 어지럽지 않았다. 변해버린 옛 풍경 속에서 변함없는 하늘과 땅이 기준이 되어주었나 보다. 어지러움을 느끼지 않고, 정말이지 어지럽게 여기저기를 참 구석구석 돌아다녔다.
그 시절 어린이였던 나의 발걸음을 호기심으로 조심스럽게 뒤를 밟으며 걸어갔다. 그 걸음에는, 종종 그 옛날 가족의 발걸음이 함께 등장했다가 어느새 살아있는 낯선 누군가의 발걸음이 그 걸음을 이어받아 다시 제각각 나아갔다. 간간이 들려오는 사투리에는, 친척들의 목소리와 그때 그 시절 이름 모르고 얼굴 몰랐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한 데 섞여 있었다.
옛길을 다시 걸으며 이 공간과 시간을 함께 엇갈려가며 걸었던 모든 이의 발걸음에, 어떤 예의(禮)를 표하고 싶었다. 살아가고 살아내고 살게 했던 모든 이의 발걸음에 예를 갖추고 싶었다. 살아 있는 나의 발걸음으로 지난날의 예스러움에 '예'를 표하고 싶었다. 한 발 한 발 딛고 나아갔던 발자국이 스며있는 옛길 위에, 살아서 교차하는 나의 오른발과 왼발의 걸음으로 작은 표시(ㅅ)를 해주고 싶었다.
'아직 기억하고 있으며 간직하고 있으며, 다시 간직하려 한다는 것을...'
예스러움에 예(禮)를 다하는 마음으로, 두 다리를 걷어붙여 머리 위로 받쳐 올려 걸었다(ㅅ). 예스러움을 머리 위에 바쳐 올려 걷는 사람(人)의 모습은 '옛'이라는 문자로 결합되어 어딘가에 다시 아련하고 분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말 없는 걸음으로 감사를 표한다.
- 박 상 민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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