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가을본색(本色)
본색(本色)을 드러낼 때가 되었다
다 같이 초록이었던 시절
그 이전부터
제일 먼저 시작되었던 색
빛이 저물고
다 같이 어둠 속에서도
어둠 너머로 간직하고 있었던 색
그 色을 온전히
들어 올려
밖으로 낸다
천천히 대수롭지 않게
제자리에서
- 박 상 민 -
수필
가을본색(本色)
초롱초롱 이슬을 머금은 연둣빛 봄을 지났다. 이윽고 초록의 여름. 그리고 가을.
이른 아침 가을 길을 걷고 있다. 여기저기 사방팔방 제각각 떨어져 있어도 낙엽 잎 놓인 길을 걸을 땐 어지러움이 없다. 사뿐사뿐 내딛는 발걸음엔 무게감이 실리지만, 오히려 몸은 가벼워진다. 대각선으로 꽂히는 볕이 그늘과 분명한 경계를 이룬다. 서늘함에서 따사로움으로 발걸음은 접어든다.
아침 햇살과 함께 올려다본 나무는 저마다 제각각 색을 드러내고 있다. 다 같이 초록이었던 시절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간직하고 있었던 色을 이제 드러내 보인다. 해가 지고 다 같이 어둠 속에 있었을 때도... 어둠 그 너머로 간직하고 있었던 색을 이제 펼쳐 보인다. 주황과 노랑 그리고 붉은....
대수롭지 않게 초록을 휘리릭 훑었던 눈빛은 자꾸만 색 앞으로 다가선다. 자기 안에 스스로 간직하고 있었던 색은 눈빛을 돌려세우는 힘이 있나 보다.
나에게 있는 色.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色. 비웃음에 된서리 맞고 황급히 쑤셔 넣었던 色. 돈이 안 되기에 망치로 한풀이하듯 처박아 넣었던 色. 견주고 비교하며 스스로 밑동을 잘라버렸던 色. 초라하고 볼품없었던 바로 그 色.
그래도 희미하게 타들어가는 불꽃을 신발 밑창으로 매몰차게 끄지 못했던 色. 문득문득 떠오르고 조심스레 마주했던 그 色.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희미하고 선명한 바로 그 色
그렇게 가을은 色이 된다.
대수롭지 않게... 천천히... 제자리에서...
- 박 상 민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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